아침에 사고 실험과 생각 정리를 하는 루틴을 만들었다.
하루 중 머리가 가장 맑을 때 종이를 펼치고 생각나는 말을 적는다. 잘 정리될 때도 있고, 화살표만 잔뜩 늘어날 때도 있다. 오늘은 후자였다.
종이 아래쪽에는 질문 하나가 비스듬히 적혀 있었다.
‘나도 모르게 내 결과물이 칭찬받기를 바랐던 걸까?’
회사에서 받은 Feedback이 마음에 걸린 뒤였다.
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. 그러자 가장 먼저 나를 의심하게 됐다. 내가 듣고 싶었던 건 Feedback이 아니라 칭찬이 아니었을까. 기대했던 말과 다른 말이 돌아와서 불편했던 건 아닐까.
그런데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그 말의 방식도 계속 마음에 남았다.
그래서 종이 위쪽에 이렇게 적었다.
‘다수 앞에서 내 표현을 검증하는 행위의 본질.’
그리고 그 아래에 두 개의 부등호를 그렸다.
진실 > 사람
틀린 것을 발견하면 “그건 틀렸다”고 바로잡는 방식이다.
진실 < 사람
같은 말을 “혹시 이런 표현이지 않나요?”라고 묻는 방식이다.
나는 두 번째가 편하다. 그래도 첫 번째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. 말이 아픈 것과 틀린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. 조금 불편하더라도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 말을 들을 기회는 필요하다.
두 방식 모두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.
문제는 그다음이다.
직설이 계속 한쪽으로만 반복되면, 누군가는 거리낌 없이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말을 해석하느라 바빠진다. 무슨 뜻인지 헤아리고, 자신의 의도를 다시 설명하고, 괜히 생긴 오해까지 정리해야 한다.
누군가의 솔직함이 다른 사람의 일이 된다.
나는 그걸 소통 비용이라고 적었다.
회사에서 Feedback을 준 사람을 마음속으로 편집자와 비판자 사이에 놓아보기도 했다. 직책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. 결과물을 함께 고치려는 말이었는지, 틀린 점을 찾아 말하는 데서 멈춘 것인지 생각해보기 위한 비유였다.
물론 그 경계가 언제나 선명한 것은 아니다. 결과물에 관한 말을 내 능력이나 의도 전체에 대한 평가로 확대해서 들은 건 나였을 수도 있다. 그러면 Feedback을 받아들이기 전에 나부터 지키고 싶어진다.
반대로 결과물에 대한 말이 어느새 사람의 성향과 의도까지 재단하고 있었다면, 그것까지 작품을 위한 Feedback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.
아마 둘 다였을 수도 있다.
나는 내 결과물이 칭찬받기를 바랐고, 그 Feedback에도 불필요한 소통 비용이 들어 있었다. 둘 중 하나가 맞는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.
내 결과물에 고칠 점이 많다는 건 인정하고 깨달으면 된다.
그와는 별개로, 그 Feedback이 좋은 Feedback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.
